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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다.


이 글은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날. 

아마 5월 17일이었던것 같다.

그날 점심, 부랴부랴 급하게 점심을 먹고 종각역에 있는 영풍문고로 달려 가서 한권 집어들고 온 '채식주의자'

수상 당일이라 예전에 인쇄된 책이라 최종 후보라고만 적혀있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수상을 했다고 해서 찾아본다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이 날은 왠지 '이 책 사서 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꿈을 꾼 이후 극단적 '채식'을 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 나무불꽃



세 단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있고, 각 단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이 채식주의자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꾸며져 있다. 



첫번째 단편 '채식주의자'는 채식의 시작을 가장 가까운 사람가까웠던 사람, 남편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어떤 꿈을 꾼 이후 채식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상실에 대해 얘기한다. 인간관계는 부인과 남편, 부모님, 형제, 사회(여기서는 소속된 회사라 해야하나)까지 여러 관계에 대해 부정당하고 부서지는것들을 표현한다.


두번째 단편 '몽고반점'은 주인공(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걸 알게된 그녀의 '형부'의 관점에서 얘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형부와 그녀의 관계, 또 다른 관계의 상실을 다룬다. 


세번째 단편 '나무불꽃'은 극단적 채식을 진행하며 '꽃'을 통한 안정,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이던 주인공이 결국 스스로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몽고반점의 일이 일어난 이후, 병원에서의 생활과 언니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점점 망가져가고 나무와 같아져 가는 주인공의 얘기를 보여준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리는 주인공.





책은 전체적으로 문체나 여러 표현들이 잘 읽히는 편이다. 

세 단편을 한호흡에 읽어도 길지 않은 느낌이 든다.


채식을 진행하는 꿈의 묘사, 채식을 진행하는 과정의 묘사가 

굉장히 절제된 표현을 통해 숨을 조이듯 전개되고 

이 흐름을 각기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여주며 읽는 사람을 묘하게 설득한다. 


특히 꿈꾼 장면들에 대한 시각적 묘사는 상당히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우리 문체로 피부에 닿는듯 굉장히 세심하게 묘사된 이런 부분들이 번역되면서

영어에서 느낄 수 없는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준게 

맨부커상을 받은데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다.


몽고반점을 읽을 때는 내가 훔쳐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건 마치 초등학교 시절 '상실의 시대'를 책장에서 꺼내 처음 봤을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굉장히 자극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어느새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들. 







다시한번 얘기하자면 전체적으로 잘 읽히는 책이다. 

퉁명스럽게 진지한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는 방식, 

담담한듯 얘기하지만 극도로 세심하게 자극하는 방식등이 

책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줬던것 같다.


하지만 한 호흡에 읽었기 때문일지. 

개인적으로는 각 단편이 끝나고 새로 시작되며 화자가 바뀔 때 

이 얘기가 어떤 얘기인지 

언제의 얘기인지 

누가 얘기하고 있는건지를 생각하느라 

글의 흐름에 대한 몰입이 많이 망가지곤 했었어서 좀 아쉽다. 


이런 흐름과 독자의 반응, 전개까지도 작가가 고려한 부분일수 있지만.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현대인 중 한 사람인지라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들이 좀 더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단편들이 바뀔때마다 몇장을 읽고 다시 되돌아가서 단편 처음 부분을 다시보는 과정을 반복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었고,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인 주인공 대해 얘기하자면, 주인공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규정지어, 

하나의 단어를 부여함으로써 그녀를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평가하고 소비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렇게 불림으로써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그런 편향된 방식으로 이해될 것이 아닌데도 

'채식주의자'로 비춰지며 대해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어느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만 두고,

어떤 단어로 규정지어 얘기하고 생각하고 소비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는, 

그 사람의 일부를 보여줄 순 있겠지만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낼 순 없다. 


책의 제목은 '채식주의자'이지만, 

글 내용에서 그녀가 왜 채식을 하는지, 

그녀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나와있지 않다.


비록 제목은 '채식주의자' 이지만, 

그 하나의 단어로 그녀를 생각하지 않게, 

그녀에 대해 좀 더 많은 이해와 

좀 더 여러가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이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말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줄지가 기대된다.